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기 드 뤼지냥 (문단 편집) === 포로 석방 후 === 1188년, 석방된 기는 시빌라와 함께 티레로 향하였으나, 티레의 영주이던 코라도가 '''"무슨 낯짝으로 여길 오는거냐!"'''면서 길길이 날뛰며 입성을 거부하였다. 그 때문에 티레 성 밖에서 한동안 머물다가 [[제3차 십자군 원정]]대가 오자 그들과 함께 합류하여 [[아크레]] 공성전에 참여하였다. 물론 살라딘에게 다시는 적대하지 않기를 맹세했지만, 이교도에 대한 맹세를 깨는 건 교황께서 친히 면죄부를 내려주시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바로 이 아크레 공격이 그의 최대(?) 업적이라 할 수 있는데, 때마침 하틴 전투의 참극을 전해들은 유럽의 동지들이 속속 십자군 수하의 몇 안 남은 항구 도시들로 들어오고 있었던 덕분이었다. 이 멋모르는 유럽 친구들이 부하에게 무시당하며 아크레 앞에서 얼쩡이는 기의 군대를 보고 '''"예루살렘의 왕이 적은 병력으로 대적과 맞서 싸우는데 부하란 놈은 성에서 벌벌 떨고 있다."'''고 생각해서 모두 거기로 가 합류하는 바람에 정작 티레를 지켜낸 코라도는 개털이 되고, 기는 명성을 드높일 수 있었다. 역시 인생은 타이밍. 그런 것도 있지만, 당시 아크레를 점령했던 [[살라흐 앗 딘]]은 아크레의 요새를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해버렸기 때문에 기 드 뤼지냥이 아크레를 접수하자 제3차 십자군에게는 그야말로 '''최적의 집결지'''가 굴러들어온 셈이 되었다. [* 그 뒤로도 아크레는 맘루크에 의해 함락되는 1291년까지 100여년간 십자군 세력의 주요 거점으로 남아있었던 걸 생각하면 기의 아크레 원정은 결과적으로 신의 한 수가 된 샘.] 하지만 1190년 아크레 공성전 와중에 시빌라와 그의 두 딸 알리스, 마리가 모두 전염병으로 사망하자, 상속법상으로 기에게는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을 주장할 근거가 없어져버렸다. 그동안 기의 무능에 치를 떨던 예루살렘 왕국의 제후들은 기는 더 이상 예루살렘의 왕이 아니라고 선언하고, 이사벨을 여왕으로 추대하였다. 당시 이사벨의 남편은 토론의 옹프루아였는데, 그는 샤티옹의 양자였으며, 예전부터 부인과 함께 왕위에 오르려 하기보다는 시빌라와 기를 지지하는 야심이 없는 인물이었다. 이것이 불만이었던 제후들은 이사벨과 옹프루아를 이혼시키고는 그녀를 몬페라토의 코라도와 결혼시켰다. 코라도는 마침 십자군의 일원으로 아크레에 도착한 [[프랑스]]의 왕 [[필리프 2세]]의 든든한 지지를 받고 있었으나, 하필 같이 도착한 사자심왕 [[리처드 1세]]가 필리프 2세와 결혼문제로 싸우면서 사이가 틀어지자, 이쪽에선 반대로 기를 지지하면서 대립 구도를 형성해주었기에 한동안 왕위를 놓고 분쟁이 벌어졌다. 하지만 3차 십자군 원정이 마무리되고 리처드 1세가 본국으로 귀국하자, 기는 지지 기반을 잃었고 어쩔 수 없이 [[예루살렘 왕국]]의 왕위를 이사벨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리처드 1세]]가 원정과정에서 점령한 [[키프로스의 이사키오스 콤니노스]]가 지배하던 [[키프로스]]를 기에게 선물해주었기 때문에 기는 키프로스의 영주가 되었으며, 덕분에 1192년 키프로스 왕국의 초대 국왕으로 기록되었고 그 후 열심히 성전을 명분으로 한 해적질을 하면서 지내다가 1194년에 사망한다. 그가 죽을 당시 후계자를 남기지 못했던 까닭에 형인 [[애므리 드 뤼지냥]]이 그 뒤를 이었다. 이후 키프로스의 왕좌는 1474년 자크 3세 때까지 애므리의 후손이 계승했다.[* 여담으로 1489년 자크 3세의 모친이자 키프로스의 마지막 군주인 [[카테리나 코르나로]]가 [[베네치아 공화국]]의 압력으로 왕국을 해체했고, 베네치아 공화국의 일부가 된 키프로스는 1571년에 오스만 제국에 점령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